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장석남)

   

   미선
   김지하 - 우리가 하자

우리가 하자

-김지하


몹시도 눈이 쌓인 날
치악산 밑에 사는
한 친구집에 간 일이 있었지
지금도 생각난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들을 하는지
참 우수한 아이들이었는데
넷이었던가
다섯이었던가
기억은 참되지 않다
기억은 오직 구성될 뿐이다
눈에 덮인 너와집
그 작은 방
그 희미한 촛불
해월 선생처럼 수염을 기르고 엄장 큰 한 분이 농주를 마시고 있었다
첫 마디
'베토벤이 죽은 날 마르크스가 태어났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긴 논쟁은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나는 낫셀의 방향을 주장했던 것 같고
공과를 지망했던 내 친구는 그 무렵에 벌써 로스토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얘기는 사분 오열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똑같은 것이었다
'베토벤이 죽어간 날
마르크스가 태어났다
이 점을 기억하라
역사는 대를 이어서 자기의 본체 이성을 발전시키는 법이다
그래서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미끄러지며 넘어지며
고등학교 모자가 날아가고
다시 줏어 쓰며
우리가 얘기한 것은
한 가지였다
'우린 아직 어리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것도 저것도 다 틀렸다
우리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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