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장석남)

   

   미선
   황동규 - 겨울의 빛

겨울의 빛

- 황동규

마지막으로 잠긴 창의 단추를 벗기고
단추 구멍의 실밥을 벗겨내고
자갈 위로 눈내리는 소리를 듣자
여섯개의 수정(水晶)깃을 달고
어둠을 자기몸만큼 흔들어 녹이고
끝내는 몸뚱아리까지 녹여 없애고
작고 하얀 자들이 날아다닌다
없는 팔로 바람을 껴안고
서로 만나고 피하며 부딪치고 숨다가
바람이 바람이 되기위해 몸을 흔들 때
하나씩 들켜 하얀 결정체(結晶體)가 되어 내린다

첫눈 녹다 말고 또 눈 내리는 저녁
발목을 물에 담그고 숨어 있던
조그만 무지개다리가 내린다
멀리 기적 소리 들리던 기차도
일찍 켜져 어리석게 매달려 가던
불빛도 내린다
도처에 숨어 있던
숨음 속에 숨죽임 속에 낯이 익던
너무 낯익은 자신이 무서워
거리에 나가 어리석게 들켜
숨쉬며 우리가 되던
우리들이 내린다

내리지 않고 다시 뜨는 몇송이 눈
부서지지 않고 뜨는 맛에 취해
잠시 눈을 감고 헤매다가
다른 눈에 겸쳐 내린다

들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좀더 넓게 떠돌 수 있었을 것인가
들키지 않았다면
더 많은 들과 산을
긴 지평선을
그 위에 떴따 사라지고 다시 뜨는
구름과 왜가리떼와 텅 빈 하늘을 마음의 틀로 가지고 있었을 것인가
겨울이면 자기 숨소리보다 더욱 넓게
속으로 주위를 녹이던 샘물을
마음의 틀로?

사람 사이에 사람이 들켜 사람이 될 때
들키지 않았다면
사람 사는 거리를 옅은 안개처럼 떠돌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중간에서
보이는 것을 그리워하는 안보이는 것이 되어
혹은 하회(河回)를 싸고 도는 낙동강 물이 되어
하회(河回)탈을 비출 수 있었을 것인가
웃는 탈과 우는 탈 성난 탈을 동시에 비추는,
그 뒤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탈을 비추는,


아니다, 지금도 우리는 숨어 있다
낮은 겨울해 바람에 밀리고
망치 든 구름 하늘을 가로지를 때
우리 모두의 마음 떠올라 자욱히 하늘에서 쫓길 때
타이 매고 단정히 걸으며
혹은 타이 풀고 겨울밤을 등지고
인간의 귀를 모두 열고 땀구멍까지 열고
술에 취해 큰소리로 자신을 주고받아도
우리는 숨어 있다


어느날 누가 나서지 않아도
모이는 우리들
노래하며 모이는 우리들
노래에 모여서 각기 다른 목소리로
함께 노래 부르는 우리들
두려움 속에 삶에서 노래로
노래에서 삶으로 도주할 때
노래 부르지 못하는 자신이 들킬 때
혹은 들켜서 도주하지 못하고 노래 부를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닐 것인가
달리다 혼자 선 채 잡혀 땅 위에 점을 찍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감탄사가 되는 것이 아닌가
감탄사 속에 숨은 틀이 되는 것이 아닌가

눈이 내린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어둠 속에
눈 내리는 소리로 바뀌는 소리 들린다
창의 단추를 다시 잠그고 자리에 누워도
들린다, 들린다, 창의 고리를 벗기고 다시 눕는다
내 감춘 모든 것이 나에게 들켜
부석사(浮石寺)가 되고 더러는 떨어져 나가
하회(河回)가 된다
다시 가 보아야 하리
가는 길은 사람 사이에서 자신에 들켜 숨쉬며
자기가 되는 길이리
우선은 마음의 관리인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새벽 눈 위에 찍힌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리
모든 마을의 맨처음 입구(入口)를 만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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