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장석남)

   

   미선
   이영진 - 벽, 그리고 환멸을 위하여

벽, 그리고 환멸을 위하여

-이영진


1
흐르는 강가에서
사랑이 분명한 때가 있었다.
산악처럼 거대하게 보이던 적이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엄격한 분노와 그 쓰라림으로
살아가는 일에 생기가 있었다.
불어오던 눈물가스의 낭자함 앞에서
온몸이 저절로 떨어 울던 시절이
모든 것이 분명한 제 이름과 표정으로 울던
시절은 가고 겨우내 눈이 내리고
아무도 확실하게 절망하지 않는다.
여전히 강은 흐르고
변한 것은 없는데, 왠지
만나는 이마다 주량이 줄었다고 한다.


2
거꾸로 읽고 뒤집어서 생각하는 것은
이제 오랜 습관이 되었다고 너는 중얼거리고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고
너는 거듭 중얼거리고 확실하게
지면은 증면됐다.
행간과 행간 사이에 고여 있는 가득한 침묵,
수많은 사실은 언제나
또 하나의 벽이 되고 습관성 두통은 끝나지
않고, 지난 겨울 내내 눈이 내렸다.


3
불확실한 편안함이 늘어난 대신 모두들
말이 줄어들고 눈치가 빤해졌다.
실감나게 말하는 법을 잃어버리면서
모두들 어디론가 떠날 준비들을 한다.
사는 일의 세밀한 곳까지 이제
비밀이 될 수 없는 세상인데도
수많은 사실은 언제나 벽이 되고
눈앞을 가로막는 기둥이 되고
길은 보이지 않는데도 모두들 은밀하게 떠날
준비를 한다.
강은 흐르고 사랑은 결코 끝나지 않았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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