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장석남)

   

   미선
   정해종 - 백지 위의 날들

백지 위의 날들

-정해종

열풍이 지나간다
모래바람과 불길을 데리고
마음을 지나간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같았던
말수 적은 생각들이 화상을 입는다
무엇 하나 남지 않는다
연기 피어오르는 검은 벌판에
갈가마귀 떼 날아오른다
어디서 또 박새의 가슴 털 같은
풀씨들은 날아와 우기를 기다릴 텐데,
달구어진 마음 깊숙한 곳
채 꺼지지 않은 불씨들이 남아
가쁜 숨을 몰아 쉰다


마음 한쪽에서
사막의 암세포가 자라는 걸 나는 알지 못 했다
다만 그저 난감하게
눈 내리는 벌판을 방황하고 있었을 뿐이다
지나온 발자국 이내 지워지고
온 길도 갈 길도 일러주지 않는
차디찬 침묵과 희디 흰 내성의 설원
나를 끝없는 죄의식으로 몰아넣고
구불구불한 수직의 선을 그으며
나와 세상을 흰 빛으로 덮고 있는
이 막막한 풍경의 속내를 알 수 없다
단 하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끝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다
내 속에 자라는 사막과
사막을 지나는 열풍과 무관하게
사시사철 눈은 내리는 것이다
밤낮으로 퍼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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