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장정일 시집을 봤어요.
읽지는 않고 늘 책장에 꽂아 두기만 해서
새책처럼 멀쩡한데도 표지의 색깔은 누렇게 바래버린,
<햄버거에 대한 명상> 이라는 제목의 시집...
5년전,우리과 선배한테 받은 시집인데
아직 한번도 끝까지 읽어본 적은 없어요.
오늘도 역시... 다섯편을 못 넘겼네요.
근데, 그 시집 앞에 이런 글이 써있어요.
불사조는 9000년에 한 번씩 죽는다.
자신이 태어났던 산봉우리에 불을 지피고
붉게 타서 죽는다. 그리고 남은 재 속에서
악어머리를 가진 불사조가 다시 나온다.
-<오래된 옛날 노트> 중 97.朴
내게 그 시집을 준 朴이라는 선배의 글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글이에요.
하긴, 그 선배 자체를 난 늘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잘 읽히지 않는 장정일의 시들처럼
그 선배를 난 늘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그 선배 얘기를 하니까 문득 생각나는 게 있네요.
그 당시에 내가 안도현 시인을 참 좋아했었거든요.
근데 그 선배는 그걸 못마땅해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과실에서 날 만나면 그런거 읽지말고 이런거 읽어봐, 하면서
책 제목을 적은 쪽지를 건네주곤 했죠.
그런 그 선배가 내게 안도현 시집 두 권을 빌려 갔었는데
시집을 돌려주면서 자작시를 한편 지어줬어요.
그 시의 3연이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구요.
후배한테 시집 두권을 빌렸다...
시집의 표지에 있는 글을 다 읽을 때쯤 사발면에 부을 물이 끓었다...
끓는 물의 수증기를 유독가스로 착각한 파리 한마리가 방바닥으로 내려와 앉았다...
후배한테 빌린 시집 한권으로 사발면 뚜껑을 덮었고...
또다른 한권으로는 방바닥에 앉은 파리를 덮었다...
그 시를 읽고 참 많이 약올랐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내가 아끼는 시집을 빌려줬는데
한권으로는 사발면 뚜껑을 덮고, 한권은 파리를 덮었다니까.
그런데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장정일 시인의 시집이 내방 책꽂이에 몇년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거나
안도현 시인의 시집이 그선배의 사발면 뚜껑을 덮는데 사용된 거나
결국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네요.
내게 장정일 시인의 시가 잘 읽히지 않는 것처럼
그 선배에겐 안도현 시인의 시가 잘 읽히지 않았던 것뿐이니까.
어쨌거나.. 그 선배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런지...
지금도 악어머리 불사조를 믿고 있는지...
혹은, 자신이 불사조가 되어가고 있는지...
9월이네요. ^^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