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만 견디고 있는 게 아니므로 세월은 또 느릿느릿 흘러갈 것이다...(강연호)


   

   미선
   나를 멈추게 한 것

보도 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반칠환,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속도에 대한 명상13


지난 수요일, 친구를 만나러 영풍문고에 갔다.
좀 늦을 것 같다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새로나온 시집을 살펴볼 생각으로 시집 코너에 갔는데
어느 할아버지께서 그곳에 앉아 시집을 읽고 계셨다.
나는 문지의 새로나온 시집을 꺼내들고는 그 할아버지 맞은 편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시집은 잘 읽혀지지 않고 나의 눈은 자꾸만 그 할아버지에게로 향했다.
할아버지의 머리는 희끗희끗 이미 반백이었고
글씨가 잘 안 보이시는지 미간을 찌푸리신 채로 책을 눈 앞에 바짝 끌어당겨 시집을 읽고 계셨는데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책을 읽는 할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그 할아버지의 청년시절 혹은 소년시절의 모습이 겹쳐보이는 듯 했다.
그날, 친구를 기다리면서 내가 새로 읽은 시는
그 할아버지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나는 그 할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그날 할아버지께서 읽고 계셨던 반칠환 시인의 시한편을 찾아 읽어본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시간들이, 조금만 더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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